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고둔 사건 (문단 편집) === 폭발 === >그 검은 연기와 폭발음에 나 역시 놀랐다. 나는 장쭤린의 머리 역시 하늘로 높이 솟아 날아간 것으로 여겼다. >---- >-고모토 다이사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Zhang_zuolin_in_1928.jpg]] || || 폭발 직후의 삼동교 || 장쭤린이 우쥔성과 말하는 사이인 새벽 5시 23분, 열차는 삼동교를 지나고 있었고 그 순간 두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관동군이 매설한 600킬로그램의 폭약이 장쭤린이 타고 있던 특별전망차와 식당칸 사이에서 터진 것이다. 구도 데쓰사부로의 서술에 따르면, 고모토의 지시를 받은 공병 중위 후지이 데이쥬가 육교 아래 오른쪽에 두개의 폭탄을, 왼쪽에 한개의 폭탄을 설치한 다음에 만철 전망대까지 전선을 연장하여 그곳에서 상황을 주시하였고, 열차가 다가오자 스위치를 눌러 터트렸다 한다. 장쭤린이 탄 차량은 산산조각이 나서 10미터 솟아올랐고 바퀴 두개 빼고 남은 것이 없었다. [[우쥔성]]은 머리에 쇳조각이 박혀 즉사했고 온수선도 부상을 입었다. 마 부인도 다리에 경상을 입었다. 이외에 농공총장 모더후이가 머리부상을, 육군총장 [[장징후이]]가 목 부상을 입었으며 유철, 우국한도 여러 부상을 입었고 일본인 고문 키가 세이야도 얼굴과 손에 경상을 입었다. 영문판 시사신보에 따르면 사망자가 20명, 부상자가 53명이었다 한다. 온수선이 장쭤린에게 다가가보니 옷이 너덜너덜해졌으나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목에 깊은 구멍이 나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수선이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동여매고 장학증을 불러 장쭤린을 제은명이 탄 칸으로 옮겼다. 부관 왕헌무가 장쭤린을 안아 눕혔고 장학증과 두택선이 장쭤린을 20분만에 차를 구해서 원수부로 긴급히 옮겼다.[* 여담으로 이때 장쭤린을 옮길 때 썼던 차량은 어느 신혼부부가 타고 있던 결혼식용 차량이었는데 장쭤린을 옮기기 위해 이들을 무리하게 쫓아내고 차를 뺏었단 말이 있다. 장제스 평전에는 이 차가 봉천 방직공장에서 구한 포드 자동차라고 적혀 있다.] 원수부 동원 소청루에 도착하여 거실에 모셔진 장쭤린을 위해 소하연의 성경시의원에서 원장인 영국인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 그가 장뇌주사를 놓았지만 이미 상처가 너무 심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9시, 장쭤린이 유언을 남겼다. >내가 상처가 너무 심하다. 잘못될 염려가 있으니 쉐량이를 빨리 봉천으로 오도록 해라.[* 쇼와 육군에 따르면, 장쉐량의 이름이 아니라 여섯째 아들을 불러오라고 표현.] 그리고 이내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54세였다. 하지만 봉천성장 [[짱스이]]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저 부상이라고 발표하고 장쉐량을 봉천으로 불러들였다. 폭발 30분 후, 봉천 교섭총서 일본과 과장 관경택이 봉천 주재 부영사 고노에게 전화하여 이 사건은 일본인의 소행이라고 항의했다. 고노가 증거가 있냐고 불만스럽게 되묻자 관경택은 증거는 더 조사해야하지만 일본인의 관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받아쳤다. 고노는 이 사실을 하야시 규지로 신임 총영사에게 보고했고 일본이 관여한 걸 알고 있던 하야시는 아침 8시, 관경택과 합동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우치다 영사가 중국 측 요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동 남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편의대원 두 명이 있었는데 수비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같이 가서 현장 검증을 해봅시다. 우치다를 따라 조사단이 남쪽으로 가보자 손에 소련제 폭탄을 쥐고 혁명군 복장을 한 두 사람의 건장한 시신을 발견되었다. 나이는 30세 전후고 머리는 빡빡 민 상태였으며 흉부에 서너방의 총을 맞아 숨져 있었다. 시체 옆에는 봉천 밀짚모자 2개와 신발 한짝이 있었고 소지품 검사 결과 편지 두통이 나왔다. 안휘성에서 생산되는 고급 편지지 위에는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라는 글이 씌어 있었고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치다는 이 시신이 바로 장제스의 편의대 소속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실은 이들은 그저 동네 모르핀 중독자들로 일본인들의 꾀임에 희생된 것 뿐이었다. 현장의 우치다 영사는 관경택에게 사건을, 장제스의 편의대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결론짓자고 했으나 폭탄의 규모를 보아서 절대로 투척이 아니었음이 분명하였고 관경택은 크게 반발했다. 6월 5일 오전 9시, 봉천 총영사 하야시가 특무기관장 하다신치, 고모토 다이사쿠, 봉천 헌병대장 미나미, 경찰서장 와다 등 관련자들을 모아 문제의 중국인들을 살해한 것을 4일 새벽으로 입을 맞추었다. 6월 10일, 우치다는 남방 편의대 소행임을 주장하는 합동 보고서를 발표할 것을 강요했고 관경택이 이럴거면 공동 조사서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항의하자 우치다는 당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일본군대가 당신을 겨냥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관경택은 장 대원수같은 사람도 다쳤는데 자신의 목숨이 대수겠냐고 뻗대어 우치다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는 6월 11일에도 교섭서로 찾아가 중국의 서명을 강요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장제스는 6월 5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젯밤, 장쭤린이 봉천 황고둔에서 일본의 관동군이 매설한 지뢰의 폭발로 부상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봉천에서는 일본인이 저질렀다고 의심하고 있지만 일본인은 아직도 우리 편의대의 행위라고 우기고 있다. 일본인의 음모는 이와 같이 악랄하다. 동북의 국방을 공고히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한편 6월 5일엔 중국 단독 조사가 행해졌는데, 봉천 공병창이 러시아 기술자 로미도프와 다얼니를 보내 기술자들이 정교하게 대량의 폭탄을 설치했음을 밝혀냈다. 관경택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장쭤린 대원수가 탄 열차는 총 20량이고 폭발 지점은 열차의 중간 지점인 제9량, 12량이었다. 제9량의 천장과 창문이 모두 돌덩이의 피해를 입었고 침목이 훼손되고 특히 뒷부분이 심했다. 제10량 긴칸이 바로 대원수와 우쥔성이 탄 칸이었다. 차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뒤의 문틀만 남았다. 뒷바퀴가 빠져 우측으로 차체가 기울어졌고 불탄 흔적이 있었다, 11번째 칸은 식당차였는데 파괴가 제일 심했다. 모든 열차 바퀴가 파손되었고 역시 불에 탔다. 이 모든 것을 볼때 폭발 시간은 정확히 일본인들이 조종한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소위 편의대원이라 하는 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관경택은 상처 부위를 칼로 오려낸 흔적과 모르핀 주사 바늘 자국이 많을 것을 보아 정상인이 아니며 편의대원이라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 '편의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곧 밝혀졌다. 이들은 위에 언급한 안도 다카나리의 사주를 받은 실직 군인 유대명[* 유재명이라고 쓴 곳도 확인되는데 장쭤린에게 원한이 있었다 한다.]이 6월 3일 포섭한 오귀생과 장문재란 사람으로, 유대명은 이들을 만철 부속지의 목욕탕인 복개천에 데려가 씻기고 이발하여 혁명군의 복장을 입혔다. 원래 사대명이란 사람도 포섭되었으나[* 쇼와 육군이나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등에는 왕씨라고 적혀 있다.] 사대명은 겁을 먹고 어둠을 틈타 달아났지만 나머지 둘은 일본군에게 죽은 것이었다. 관동군은 은폐를 위해 이들에게 혁명군 신분증을 주었으며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란 글씨와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쓰인 밀서를 넣었다. 한편 살아남은 사대명은 이러한 전말을 장쉐량의 부하에게 고해바쳤고 복개천의 사장도 편의대원의 시신을 구경하러 갔다가 이들이 자신의 가게에 왔던 자들임을 알아보고 이를 제보했다. 일본 민정당의 조사 끝에 소련제 폭탄이란 것도 봉천 고물상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산 것임이 밝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